본문 바로가기
청주시/관광명소

[청주시][관광명소][역사유적]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by 충청북도 관광명소정보 2023. 6. 15.
반응형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 분류
역사유적

- 소재지역
청주시

-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 (국립청주박물관)

- 대표전화
043-229-6300

- 모바일 전화
0432296300

- 홈페이지 주소 : 바로가기

- 충북나드리 주소 : 바로가기

- 운영시간
9:00 ~ 18:00

- 소개
충청북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삼존석상이다.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1960년 9월, 충남(忠南)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 다방리(多方里)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되었다. 장방형 4면석(面石) 각면에 불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한 비상(碑像) 형식이다. 정면 양쪽에 둥근 기둥을 세워 감형(龕形)을 이룬 가운데에 테를 두어 명문을 각자(刻字)하고, 그 안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상(三尊像)이 양각되어 있다. 본존(本尊)은 얼굴이 다 부서졌으나 단판(單瓣) 복련(複蓮)의 수미좌(須彌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상으로 옷끝은 밑으로 내려 대좌의 반을 덮었고, 옷주름은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었으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비롯하여 습의(褶의) 사이에 연주가 곁들여져 있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에 삼도(三道)는 없는 듯하고, 머리에는 연화(蓮華)와 연주(聯珠)로 장식된 둥근 두광(頭光)이 있다. 본존 대좌 밑 좌우에는 안을 향하여 사자(獅子)를 배치하였는데, 바로 그 등 위치에 복련(複蓮) 위에 시립(侍立)한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보살상(菩薩像) 역시 얼굴은 모두 부서져 알아볼 수 없으나, 단판(單瓣) 연화(蓮華)가 있는 원광(圓光)이 있고, 목에는 가슴까지 늘어진 짧은 목걸이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영락(瓔珞)이 걸쳐져 있다. 자세는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고, 천의(天衣)는 측면에서 길게 늘어져 연대(蓮臺)에 이르러 앞면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본존과 협시(脇侍)의 어깨 사이에는 원광(圓光)이 있는 나한상(羅漢像)이 얼굴만 내밀고 있는데, 손상이 심하다. 협시상(脇侍像) 좌우에는 인왕상(仁王像)이 연대(蓮臺) 위에 시립(侍立)해 있는데, 반라(半裸)의 상반신에 짧은 목걸이와 아랫배에서 원반(圓盤)을 거쳐 교차되는 긴 목걸이가 걸쳐져 있다. 이 여러 상들 밑에는 단판(單瓣)의 큰 연판(蓮瓣) 9엽(葉)이 각출(刻出)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조(高彫)되어 있다. 윗부분은 1단 낮게 보주형(寶珠形) 거신광(擧身光)이 2중으로 있어 안의 것은 삼존불(三尊佛)을 싸고 있다. 연주(聯珠)로 주상(周像)을 돌린 가운데에 화염(火焰) 속에 5구(軀)의 화불(化佛)이 있고, 밖에는 9구(軀)의 비천(飛天)이 있다. 상단(上端) 좌우 간지(間地)에는 한층 더 낮추어 인동문(忍冬文)과 탑(塔)을 받든 비천(飛天)을 4구(軀)씩 배치하였다. 두 측면에는 아래위 2단에 각각 2구(軀)씩 연경(蓮莖)으로 이어진 복련(複蓮) 위에 악기를 연주하는 낙천좌상(樂天坐像)이 있고, 하단(下端)에는 앞쪽을 향한 용두(龍頭)가 조각되었으며, 간지(間地)에 명문(銘文)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뒷면은 4단을 이루고, 단마다 5구(軀)씩의 작은 좌불(座佛)이 안치되었으며, 간지(間地)에는 인명(人名)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 장방형의 촉이 있는 것을 보면, 따로 대석(臺石)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상의 조각은 정교(精巧) 세치(細緻)하며 장엄(莊嚴)을 다하였고, 세부양식에 있어서도 고식(古式)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다. 이러한 양식과 명문(銘文)에 의하여, 조성연대(造成年代)는 신라(新羅) 통일 직후 문무왕(文武王) 13년(673)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응형